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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임스 패커/하나님을 아는 지식

1부 여호와를 알라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직하게 말해서 자신에게 여전히 낯선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명확하고 사실적인 체험을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은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우리의 개인적 체험 속에서 일어난 특정한 사건들에 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우리 중에 과거의 실망들과 현재의 고통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 대부분에게 그것들의 실제적인 영향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자신의 비통함과 고통 속에 잠겨 침울함에 빠져 들어가고 만다. 이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 : 8)'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3 : 710)." 바울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계속 그것을 마음속에 둔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것에 대해 향수에 젖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직면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기독교의 주제들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능력 등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쩌면 거의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경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경건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은 전혀 모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신학을 잘 알고 있는가,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들에 대한 접근법이 균형 잡혀있는가 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통해 우리가 갖게 된 어떤 손해나 십자가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얻은 것들은 잃어버린 것들과 십자가들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몰아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증거나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엄청난 정력을 내보인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들의 열심과 정력은 기도 안에서 최초로 표현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우리에게 그러한 기도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 우리의 하나님을 거의 모른다는 분명한 표시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되 미리 아시며,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예정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계 역사와 각 인간의 운명에 대해 최후의 결정을 내리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인간들도 천사들도 하나님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러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셋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함을 보여 준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위험을 자초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돌적인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간섭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넷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는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자신들을 알며, 이러한 관계가 삶 속에서, 죽음을 넘어서, 그리고 영원토록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준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평화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인식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구세주를 찾아야만 한다. 주님은 지상에 계셨을 때,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과 사귀셨다. 그래서 그들은 구세주를 알게 되었으며 그 분을 앎으로써 그 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 수 있다. 주 예수를 발견하기까지 그 분을 찾은 사람들만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안다고 증거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으면,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이다.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 목표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 : 3)."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주된 일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삶의 문제들 대부분은 저절로 자기 위치를 찾게 된다. 인생을 애쓸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것은 충분히 큰 목표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의 충성을 사로잡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숭고하며, 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목표가 어디에 있겠는가?

 

전능하신 창조주, 만군의 주, 그 위대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오사, 성경의 말과 진리 등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들에 정통해 있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 실제로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당신은 자신이 매우 낮아지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연약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말씀하셔서, 당신이 스스로를 절망적이고 무력하다고 판단하며 소리쳐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하나님은 실제로 그 분의 마음을 당신에게 열어 보이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시고, 당신을 동료로(언약의 동반자로) 삼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을 자신의 동료로 삼으사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며 개인적 친구가 되는 그런 관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활동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그것을 해석해 주시는 대로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 둘째,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을 주목하는 것. 셋째,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넷째, 하나님이 이처럼 당신에게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나타내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생생한 묘사들과 유추들을 사용해서 이러한 개념들을 상세히 설명해 준다.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처럼, 양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한편 성경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10 : 27)."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음성은 예수님의 주장, 약속, 부르심이다. 예수님의 주장이 인정될 때, 예수님의 약속이 신뢰를 받을 때,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이 있을 때, 예수님의 음성은 들려진것이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목자가 되시며, 그 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양으로 아신다.

 

이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점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심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아는 지식을 가지심에 따라 하나님의 교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인격이 관련되는 일이다.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관련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히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 결과이다. 하나님이 먼저 주권적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아시는 그 아심은 그들을 향한 개인적 애정, 구속의 행위, 언약적 신실함, 섭리적 보살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어지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 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존재이다.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나를 아시는 것에 좌우된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사실이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나를 아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된다.

 

하나님은 동료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나의 모든 뒤틀린 것을 보시며, 내 안에서 내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부패함을 보신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기 원하시며 나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셔서 나를 위해 죽으시도록 하셨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만한 충분한 동기를 지니게 된다. 단지 이것만 언급하더라도 아는 것이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오직 참되신 하나님

십계명 중 제2계명을 살펴보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20 : 45)." 이 계명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아마도 여호와 아닌 다른 신들의 형상을 섬기는 것을 언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 계명은 그러한 제한된 해설을 배제한다. 하나님은 상당히 단호하게, 하나님을 하나의 동물로 묘사하는 그림들이나 상들을 사용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으로 묘사하는 그림들과 상들을 사용하는 것 역시 금한다. 이사야 40 : 18에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심을 생생하게 선포하고 난 후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형상들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들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기도를 드릴 대상의 형상이나 그림에 습관적으로 초점을 맞추다 보면, 곧 그 형상이 묘사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것에 기도하게 될 것이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해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계시가 아닌 자신의 상상력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채로 있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초월하시고 신비로우시며 불가해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상상과 철학적 사고 범주 너머에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으로 주셨고, 그 분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최고의 신비는 성육신이라는 메시지에 있다. 신성의 제2위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둘째 사람(고전 15 : 47)'이 되셨다는 것 그리고 신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참으로 완전하게 인간이셨고 마찬가지로 참으로 완전하게 신적 존재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이것은 기독교가 지닌 진정한 걸림돌이나 만일 예수님이 성인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성경이 말해 주는 바를 믿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예수님이 영원하신 말씀이며, 창조 시에 성부의 집행자가 되셔서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신(1 : 2)" 바로 그 분이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이 세상 안에서 사시고, 이 세상에서 나가실 때, 창조의 능력을 보여 주는 일련의 행위를 행하셨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생명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그 아기는 하나님이었으며,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었다. 요한은 이 주제를 주의 깊고 확실하게 해설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여기에는 말씀의 영원성이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여기에는 그 말씀의 인격성이 나와 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여기에는 그 말씀의 신성이 나와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여기에는 말씀의 창조성이 나와 있다. 그 분은 성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창조 행위에서 행위자셨다. 모든 것은 그 분을 통해 지음받았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여기에는 생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그 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가 아니면 피조물들에게 생명이란 없다. 여기에 모든 형태의 생명의 기원과 유지라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여기에는 드러내시는 말씀이 나온다. 그분은 생명을 주시면서 또한 말씀을 아는 빛을 주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여기에는 성육신하신 말씀이 나온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있는 아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셨다. 요한은 성육신에 의해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말씀이 육신, 곧 진짜 인간 아기가 되셨다. 인간을 만드신 그 분이 이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사단이 된 천사를 만드신 그 분이 이제 사단에 의해 시험을 받을 수도 있는 상태가 되셨다. 그 분의 인간으로서의 완전함은 사단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에서 큰 위로를 받는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2 : 1718, 4 : 1516)."

 

한편, 성자께서는 성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신다. 복음서를 보면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께서 지시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종속적인 분으로 나타난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5 : 19, 30).",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8 : 2829)." 신인이신 성자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성부에게 순종하신 것은 성육신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관계가 아니라, 하늘에서 누리는 성자와 성부의 영원한 관계가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육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성육신이 제기하는 물리적, 심리적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고심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권한다. 성육신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위대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 : 68)." 그러므로 성육신을 해석하기 위한 실마리가 되는 본문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구절이다. 이 모든 일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성탄절의 정신은 주님과 마찬가지로 동료 인간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그런 원리에 따라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이다. 이런 정신을 보여 주는 사람은 마땅히 있어야 할 만큼 그렇게 많지 않다. 만일 하나님이 그 분의 자비로써 우리를 소생시키신다면, 하나님이 하실 일 중 하나는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이러한 정신을 더 많이 생기게 하시는 일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의 영적 소생을 바란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이러한 정신을 계발하도록 애쓰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 : 5)."

 

그가 증거하실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핵심은 삼위일체라는 계시된 신비이다. 종종 삼위일체의 교리는 너무 신비롭다는 이유로 그것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신학적 잡동사니로 여겨진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다. 요한은 구세주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 집에 그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실 것을 설명한 후에 계속해서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고 계시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보혜사의 개념은 조언자’, ‘돕는 자’, ‘옹호자’, ‘우리와 친구가 되시는 분등으로 번역된다. 격려, 지지, 원조, 돌봄 등이 모두 이 단어로 표현된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함은 예수님이 그들의 원래 보혜사이며, 따라서 새로 오시는 보혜사의 임무는 예수께서 그는 내가 너희를 돌보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너희를 돌보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대로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 새로운 보혜사의 이름을 말씀해 주신다. 그 분은 진리의 영’, ‘성령이시다. 이 이름은 신성을 나타낸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숨결)은 유사한 표상이다. 이 두 문구는 하나님의 능력이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개념을 전달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숨결은 창조 기사에서 함께 나타난다. “… 하나님의 신(숨결)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1 : 23).",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33 : 6)." 주님께서는 거룩하신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듯 그 분을 거룩하신 영(성령)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인격적인 영의 신성에 대하여 확증하신다.

 

요한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주님이 드러내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곧 세 위격이며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성자는 성부의 뜻을 행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조되는 점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기 위해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오시는 성령님은 그리스도 대신에 보혜사의 사역을 행하러 오신다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 : 26)."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 증거하느니라(15, 16)." 이 약속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언자로서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없으면 첫째, 복음도 신약 성경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라고 썼다. 둘째, 믿음도 중생도, 간단히 말해 어떤 그리스도인도 없었을 것이다. 복음의 빛이 비추어도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 4 : 4)" 눈 먼 자들은 빛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눈 먼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전능하신 역사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기독교의 진리를 입증할 수 없다. 인간의 양심에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주권적인 특권이다. 성령께서 실로 이런 식으로 증거하시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