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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레오나드 스위트,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

레오나드 스위트 지음

머리말 : NUTS 지혜

NUTS라는 말은 이 책의 메시지를 푸는 핵심 단어다. 호두, , 아몬드 등의 견과를 총칭하는 이 말은 동시에 바보, 얼간이, 미치광이, 괴짜라는 뜻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저자는 성령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Never Underestimate The Spirit), '목하 성령 아래‘(Now Under The Spirit) 등 그리스도인이 비상식적 지혜와 삶의 의미를 함축한 머릿글자로 이 단어를 재미있게 활용하고 있다. 역서에는 주로 NUTS를 그대로 쓰고,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는 의미를 풀어쓴 뒤 괄호 안에 넣었다 - 역주.

 

인간이 제정신을 잃을 때 천국은 의미를 얻는다. 필멸의 이성을 모두 등질 때 인간의 마침내 천상의 사고에 다다른다. -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정상적인 세상과 정상적인 지혜가 있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세상과 지혜가 있다. 정상적인 세상은 세상 그 자체다. 세상의 지혜는 정상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자들은 정상인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비정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규범 이탈자들이다. 그들은 세상 그 자체의 세상을 어지럽힌다. 선 밖으로 나가고 통념 밖에서 생각하며 기존의 해답을 거부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상으로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세계의 지혜의 일부다.

 

오늘날 교회의 최대 문제는? 바로 무기력한 정상 상태이다. 예수님이 정상이라는 단어를 재정의 하셨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하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세상 정상인들의 시각과 기능을 거스른다. 이 뺨을 맞으면 저 뺨도 돌려대고,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고, 여벌옷까지 내주고, 아랫사람의 발을 씻어 주고, 나를 저주하는 자 위에 축복을 쌓고, 분노 없이 살고, 목숨을 내주는 것 등 이것은 모두 정상적인사람들로서는 생각과 실천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힘든 것들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정상적인지혜를 뒤엎으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정상적인 관점이 아닌 예수님의 눈으로 보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특히, 탐욕과 자기만족에 찌든 비열하고 냉혹한 정상인들- 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그들을 버림받은 자, 잠재적 실패자로 보는가? 아니면 자신의 참 자아를 찾아야할 잠재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보는가? 복음서의 이야기 형태를 보든 바울의 교리 형태를 보든, 기독교는 우리를 직관적으로 반()직관적 삶을 살도록 부른다. 철학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신앙에 신앙의 논리란 있을 수 없다.

 

성공의 길은 섬기는 것이다.

얻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강한 길은 약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지키는 길은(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다.

당신의 강점을 알라. ? 그래야 그 강점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지는 곳은? 우리의 연약함 속이다.

자유하고 싶은가? 통제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라.

큰 자가 되고 싶은가? 가장 작은 자가 되라.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은가? 그를 축복하고 사랑하라.

 

예수님은 역사상 정상적 존재 기준을 가장 크게 이탈한 자였다. 온전한 인간이면서 온전한 하나님이니 말이다.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지배적 반응은?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가 아니라 이 얼마나 해괴한 사랑인가였다. 예수님은 자기 땅(소유)에 왔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심지어 자기 가족들까지 그분을 거부했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메시아상은 심지어 그분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한 자들마저 그분을 제거하는 것이 만인에게 상책이라고 여길 정도로 미친 것이었다.

 

일단 예수님을 만나면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제자도는 삶 전체의 영성이다. 여기 복음의 섬뜩한 초청이 있다. ‘엉뚱하고 이상한 남자예수님이 당신의 규범이 될수록 당신도 점점 그런 신종 인간이 된다. ‘제정신의 의미가 논리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신중하고 안전한 것이라면 기독교 영성은 제정신과 하등 무관하다. 기독교 영성은 극히 비논리적이고 역설적이며 가변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위험하다. 신앙의 세계는 예측불허의 별세계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이 정상으로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가? 비정상으로? 신비롭게? 상식을 초월해서? 예외적으로? 나는 NUTS라는 말을 택하겠다. ‘성령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Never Underestimate The Spirit). 바로 NUTS. 예수님의 지혜는 NUTS지혜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것은 정상 세상과 지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은 NUTS 세상과 지혜다.

우리는 외모를 본다.’ 이것은 정상 세상과 지혜다.

그러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 이것은 NUTS 세상과 지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 지혜다.

믿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다.” 이것은 NUTS 지혜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고하신 것은 그들이 나의 성물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더럽히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평범화하다. 정상화하다는 뜻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정상화했다. 우리는 성공적 교회를 NUTS 세상이 아닌 정상 세상으로 판단해 왔다. 우리는 성령의 규칙이 아닌 세상의 규칙으로 삶의 시합에 임해 왔다. ‘더럽히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상처를 내다는 뜻도 있다. 하나님을 정상화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에 상처를 낸다.’ 정상이란 우리의 수단 방법을 다해 싸워야 할 대상이다. 사실 정상에 대해 죽고 NUTS에 대해 사는 과정이야말로 성경의 언어로 새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성경에 따르면 평균적이거나 미지근하거나 정상적인 교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다.” 성경에서 가장 매서운 말 중 하나다. ‘토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게운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무난하고 평균적인 교회들에게 너희 때문에 내 속이 메슥거린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어리석은 자[바보]가 되었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길이 바보의 길임을 일관성 있게 강변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몇 문단 뒤에서 바울은 바보 개념의 배후 논리를 부연 설명한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바보이되].” 바울의 바보본문들에는 주석학자들의 통상적 해석보다 더 깊은 차원의 의미가 있다. 바울이 으레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모로스(moros). 학자들은 이 단어를 어리석은 자, 바보로 번역했지만 동일하게 그 말에는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 정신이 나갔다는 뜻도 들어 있다. 바울은 정말 나는 미쳤다고 말한 셈이다. 바울은 교회에게도 미치라고당부하는 것은 아닐까?

 

NUTS 은유에는 문제점이 있다. 대중문화가 미치다는 은유를 정상인들의 삶을 자극하는 데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이 나를 미치게 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자다. 여기서 미치다는 말은 더 이상 정상 상태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자란 [철학자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말대로 도제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예수님이 나와의 사랑에 미치셨기에 예수님과의 사랑에 미친 자다. 그래서 NUTS엉뚱하다, 미쳤다는 뜻일 수 있으나 그것을 정신 착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실성한사람들, 정말 미쳐서’ ‘정신과 병동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정상세상에서는 미친 사람들과 제정신인 사람을 판별하는 것이 정신과 의사일 수 있다. 그러나 NUTS 세상에서는 아니다. 정상적인 것과 예외적인 것을 판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당신은 전혀 실성하지 않고도 NUTS가 될 수 있다. 자신에게 물어 보라. “나는 NUTS인가?” 당신 교회에 물어 보라. “집안에 NUTS가 있는가?” 친구들에게 물어 보라. “NUTS가 될 사람?”

 

어쨌든 정신 건강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으로 제작되는 인물은 둥글둥글 원만한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균형 잡힌 사고를 지닌 성경 인물을 당신은 몇이나 꼽을 수 있는가? 언제부터 영적 스승들은 균형 잡히고 질서정연한삶을 살았던가? 언제부터 창의력과 정신적 무질서가 서로 무관한 사이였던가? 셰익스피어는 광인과 연인과 시인은 상상력이 총집결된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정신 분석이란 정신병의 치료책으로 자처하는 정신병이다라는 칼 크라우스(Karl Kraus)의 말로 내 친구 치료자들을 놀린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목사 안수심사나 선발 위원회를 통과할 사람이 있었을까? 가장 유별난 NUTS 둘은 베드로와 바울이었다. 하나는 분노문제가 있었고 또 하나는 권위문제가 있었다. 어부 베드로는 성급하고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말 많은 반항형이었다. 천막업자 바울은 무자비하고 열성적으로 박해를 일삼고 관료적인 복종형이었다. 가장 위대한 성인들 중에는 심각한 죄인들과 거룩한 미치광이들이 있었다.

 

모세는 말더듬이였다. 요한 마가는 바울에게 퇴짜 맞았다.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했다. 야곱은 거짓말쟁이였다. 다윗은 불륜을 저질렀다. 디모데는 궤양이 있었다. 나사로는 죽었다. 요한 마가는 발가벗었다. 예수님은 말썽꾸러기들과 걱정 많은 사람들과 즐겨 어울리셨다. 나오미는 과부였다. 이사야는 혀에 화인이 찍혔다. 미리암은 험담했다. 기드온과 도마는 의심했다. 예레미야는 늘 울고 우울해하며 자살을 생각했다. 엘리야는 탈진했고 나체 활보를 좋아했다. 세례 요한은 큰소리로 떠들며 메뚜기로 연명했다. 노아는 술에 취해 망가졌다. 베드로와 바울은 공공연히 반목했다...... 말하려면 끝이 없다.

 

세상을 똑바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NUTS 제자도의 정수는 다음 네 단어의 심오한 단순성에서 찾을 수 있다. ‘모두와 함께 거기 있으라.’ 간명해서 더 풍부한 이 네 단어의 신비한 특성은 기도할 때마다 더 분명해진다. 이 단순한 네 단어는 삶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날마다를 살아내기에 충분한 말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그 말을 위해 죽기에 충분하다. ‘모두와 함께 거기 있으라.’ 이 네 단어를 통달하라. 그러면 당신의 제자도는 의로워지고 당신의 교회는 정상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유지가 되며 당신의 삶은 밤새 성육신적, 관계적 NUTS, 서로 다른 요소가 함께 어울려지는 NUTS로 변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