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1.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버트란트 러셀은 “신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삶의 목적이란 우리 개인의 성취, 마음의 평안과 행복 이상의 것이며, 가족과 직업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꿈과 야망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이다. 이러한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혼란의 이유는 우리가 그러한 고민들의 출발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만일 누가 난생 처음 보는 희귀한 발명품을 건넨다면 당신은 그것의 목적을 알지 못할 것이다. 발명자 혹은 사용 설명서만이 발명품의 목적을 가르쳐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들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궁금해하면서 추측만 하도록 우리를 어둠 속에 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삶의 목적을 성경에 명확히 제시해 주셨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지침서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왜 살아 있는지, 삶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무엇을 피해야 하고 미래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철학, 심리학, 성공학 책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비밀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독교인 중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고 필연적으로 그 끝은 허무요 실패다. 큰 성공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성공한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은 절대 같지 않다. 개인적인 목표를 모두 달성하고 엄청난 성공을 이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놓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어떤 소망을 갖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눈여겨보셨고 만물과 만인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목적의 한 부분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삶을 이미 계획해놓으셨다”(엡 1:11).
러시아의 소설가 안드레이 비토프는 무신론적인 공산주의 정권치하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어느 우울한 날 하나님은 그의 눈길을 사로잡으셨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나는 레닌그라드에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너무나도 절망하여 그 순간 삶이 멈춰버릴 것 같았고, 나의 미래는 통째로 없어질 것 같았다. 삶의 의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 없이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Without God life makes no sense).' 나는 그 문장을 계속 되새기며, 그것을 계단 삼아 절망 속에서 빠져나왔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되었다.”
2.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의 출생은 실수도 불운도 아니며, 우리의 삶 또한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모든 식물, 모든 동물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고,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분은 세상을 만들기 이전부터 우리에 대해 생각하고 계셨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지구의 환경을 계획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계하셨다. 물리학자, 생물학자 그리고 그 외 다른 과학자들은 우주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 만물이 우리의 존재에 꼭 맞도록 얼마나 치밀하고 독특하게 설계되었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인류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데 얼마나 정확한지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인간 분자 유전학을 연구하는 마이클 덴튼 박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생물 과학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는 그 핵심 사안, 즉 우주는 인류를 근본 목적으로 가진 전체이며 모든 것이 각각의 의미와 이유가 있는 전체로 특별히 설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모든 일을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사랑은 하나님 인격의 본질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대로 완벽한 사랑이다. 그분은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우연의 산물’이 될 것이며, 우주의 천문학적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그럴 경우 삶에는 어떠한 목적도, 의미도, 소중함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지구상에서의 짧은 삶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우리를 만든 이유가 있으며 우리의 삶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서 12장 3절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욥기에서는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삶의 원동력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에 의해 끌려 다닌다. 원한과 분노의 쓴 뿌리를 씹으며 살아간다.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간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이끌려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간다. 이 모두가 막다른 골목, 즉 사용하지 못하는 잠재력, 불필요한 스트레스 그리고 만족하지 않는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목적을 가지고 삶에 임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삶에 멋진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는 다섯 가지 유익이 있다. 첫째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것이다. 삶에 의미가 있다면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지만, 반대로 삶의 의미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없다. 둘째,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 단순한 삶의 방식과 분별 있는 계획을 갖게 한다. “이 일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까?”라고 자문하면 된다. 셋째, 초점을 맞춘 삶을 살게 된다. 우리의 노력과 에너지를 중요한 것에 집중한다. 넷째, 삶의 동기가 유발된다. 목적은 열정을 낳기 때문이다. 다섯째, 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고, 그분은 우리의 삶에 대해 조사하실 것이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험을 통과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물으실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가르쳐 주셨다. “너는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무엇을 하였느냐?” “내가 너에게 준 것들로 너는 무엇을 했느냐?”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영생을 어디에서 보낼지를 결정해줄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영생에서 무엇을 할지를 결정해줄 것이다.
4.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현재의 삶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실제의 공연을 위한 최종 연습에 불과하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많은 선택 사항들이 있지만 영생이 제시하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천국과 지옥. 우리가 지구상에서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가 어디에서 영생을 보낼 것인지가 결정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영생을 그분과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용서 그리고 구원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의 빛 가운데서 살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모든 관계,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 그리고 처해 있는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올바르게 선택하게 할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면은 근시안적인 사고다. 그러므로 머리 속에 계속적으로 영생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 소중함과 가치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낸 9개월의 시간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닌 또 다른 삶을 위한 준비였듯이, 현재의 삶은 다음 삶을 위한 준비과정임을 잊지 말라.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바로 그것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5.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성경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삶에 대한 모습을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삶은 시험이고, 위탁받은 것이며, 임시로 맡겨진 임무다. 이 세 가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 삶의 기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시험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격, 믿음, 복종, 사랑, 투명성 그리고 충성에 대해 끊임없이 시험하신다. 인격은 시험에 의해 개발되고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시험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 나타내시고 더 많은 책임들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으로 단련시키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길 원하시며 영생에서 줄 생명의 면류관을 계획하신다.
이 땅에서의 삶은 위탁받은 것이다. 이 땅에서의 시간, 우리의 에너지, 지적인 능력, 기회, 관계 그리고 자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보고 관리하도록 잠시 맡기신 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의 청지기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 평가받을 것이고, 그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고 계시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돈은 가장 큰 시험거리가 된다. 성경은 말한다. “만일 네가 세상의 부를 관리하는 일에서조차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하늘의 진정한 부를 누가 너에게 맡기겠느냐”(눅 16:11).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수록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신다.
6. 삶은 일시적인 것이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림자만큼이나 순간적이다”(욥 8:9). 영생에 비해 이 땅에서의 삶은 지극히 짧으며, 지구라는 곳은 우리가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다. 우리의 정체성은 영생에 있고 우리의 모국은 천국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와 집착’을 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물질적 가치관과 유혹에 빠지는 것을 영적인 간음이라고 부르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느끼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않게 하시려 함이다. 삶이 힘들어지고, 의심의 구름이 몰려오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게 될 때 우리는 아직 집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죽음이란 우리가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집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7.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
우주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 스스로이시다. 영광은 그분의 본질과 광채와 능력과 임재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분의 선하심의 표현이고 그분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속성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낸다.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생물체에서부터 거대한 은하수에 이르기까지, 태양과 별, 바람과 계절 등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자의 영광을 나타낸다. 각양각색의 다양함을 즐기시고, 아름다움을 사랑하시며, 지혜로우시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세상의 빛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성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으며, 그분으로 희미하게 느끼던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깨닫고, 존귀하게 여기며, 선포하고, 찬양하며, 나타내고, 또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명령받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당신의 목적을 이루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는데, 위대한 순교자인 성 이레니우스 교부는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온전히 살아가는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만 그 모두를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5가지 목적으로 요약하여 이 책이 끝날 때까지 그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5가지 목적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돌린다. 둘째, 우리가 한 가족이 되어 사랑함으로 영광을 돌린다. 셋째,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영광을 돌린다. 넷째, 받은 은사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영광을 돌린다. 다섯째,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함으로 영광을 돌린다.
자기 중심적인 삶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은 가끔은 쉬운 길 대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단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면 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첫 번째 목적 - 예배를 통해 영광을 돌린다
8.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첫 번째 목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어떠한 피조물보다도 하나님께 많은 기쁨을 드린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을 예배라 부르며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동이 예배다. 인간은 어느 문화권에서 살든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섬기는데,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신적인 존재와 연결되고 싶다는, 하나님이 인간 안에 만들어놓으신 우주적인 갈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예배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예배가 될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한 것처럼 함으로써, 또 그것을 하는 동안 그분과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예배드리는 삶의 비밀이다.
9.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
노아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미소짓게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예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가장 사랑할 때 미소 지으신다. “나는 너의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사랑을 원한다. 나는 너의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더 알기를 원한다”(호 6:6)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 지으신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 지으신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미소 지으신다. 예배는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들에 기뻐하고 우리가 그 즐거움을 하나님께 표현할 때 하나님 또한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 다섯째,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을 사용할 때 미소 지으신다. 우리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숨기거나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때는 하나님께 영광이나 기쁨을 드릴 수 없다.
10. 예배의 중심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자비에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항복은 순종을 통해 가장 잘 표현된다. 스스로를 항복하여 내어드린 가장 훌륭한 예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항복은 “아버지, 이 고통, 이 아픔 혹은 이 상황이 당신의 목적과 영광을 위해 필요하다면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성숙하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도 피땀을 흘리실 정도로 고민하셨다.
그러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릴 때 우리는 복을 누리게 된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둘째,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셋째,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집요한 유혹과 어려운 문제들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길 때 그분의 능력으로 해결 받을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이나 교만은 어느새 사라진다. 바울은 말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리고 이를 위해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다. 항복은 매순간 이루어져야 하고, 평생 해야 하는 것이다.
11.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기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는 여러 가지 다른 면이 있지만,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 가운데서 살도록 만들어졌지만 타락 이후 그 이상적인 관계가 사라지게 되었고 구약 시대에는 몇 명만이 하나님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셨고,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으며 욥, 에녹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친밀한 우정의 관계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더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상황을 바꿔놓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셨을 때 성전에 드리워졌던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이것은 사람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하나님이 나를 친구로 두고 싶어하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은 말한다. “그분은 너희와의 관계에 대해 열정을 가진 하나님이시다”(출 34:14).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친구로 원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친구였던 성경 속 인물들의 삶을 연구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우정을 쌓는 데 관한 6가지 비밀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첫째,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가능하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한 가지 방법은 숨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숨에 이야기할 수 있는 짧고 간단한 문장을 선택해 기도하는 것이다. “당신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는 당신께 속해 있습니다”와 같은 문장들이다. 로렌스 수사는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과 우정을 맺는 두 번째 방법은 하루 종일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욥과 다윗이 하나님의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고, 하루 종일 묵상했기 때문이다. 욥은 “내 일용할 양식보다 그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고백했으며, 다윗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라고 말했다.
12. 하나님과의 우정을 키워나가기
세 번째 방법은 완벽한 솔직함이다. 우리의 잘못과 느낌에 대해서 솔직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정직함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인 모세, 다윗, 아브라함, 욥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이 밀려오는 의심과 싸운 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의심을 상투적이고 종교적인 말들로 덮어버리기보다 공개적으로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의심을 표현하는 것은 때때로 하나님과 한 단계 더 친밀해질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
네 번째,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의무나 두려움, 또는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신 그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이것의 가장 좋은 예는 바울이다. 하나님의 관심거리는 그의 관심거리였고, 하나님의 열정이 그의 열정이었다.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백성을 되찾는 것이었고 잃어버린 모든 자녀들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우리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우정을 소망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연이 아닌 우리의 선택이며 우리가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일부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모두, 영혼 모두, 생각 모두 그리고 우리의 힘 모두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반밖에 없는 헌신, 부분적인 순종 그리고 남는 시간과 돈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삶의 작은 부분이 아닌 온전한 헌신, 온전한 예배를 원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정확할 때 기뻐하신다. 예배는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성경에 거짓 없이 드러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예배가 진실할 때 기뻐하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셋째, 우리가 사려 깊게 예배드릴 때 기뻐하신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넷째,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현실적일 때 기뻐하신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영국의 찬양 인도자 매트 레드맨은 자신이 목사님에게서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어떻게 배웠는지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그 목사님은 예배가 음악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 예배 시간 동안 노래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기간이 끝날 무렵 그는 ‘예배의 마음(Heart of Worship)'이라는 곡을 썼다. “노래 이상의 것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노래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당신은 나의 마음을 보십니다.
14.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가장 깊은 경지의 예배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험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삶을 내어드리며, 그분이 멀게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간혹 관계의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은 멀어진 것 같은 시기, 즉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거나 잊으셨다고 생각되는 때를 통해 시험하실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영적인 메마름의 시기를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했다. 헨리 나우웬은 ‘부재의 사역’이라고 표현했으며, A. W. 토저는 ‘밤의 사역’이라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마음의 겨울’이라고도 했다.
크리스천들이 오늘날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는 하나님보다 경험이나 감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초신자일 때 하나님은 많은 감정의 확신을 주시고, 미성숙하고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도 응답해주신다. 그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서 그분은 이러한 의존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도 우리가 당신의 존재를 느끼기 원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느끼기보다 신뢰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은 감정이 아닌 믿음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때 그런 우리의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계속 신뢰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깊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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