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운동가로서의 예수
예수님은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투쟁한 것이 사복음서의 행적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는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소유계층을 맹렬히 규탄하면서 가난한 자를 돕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가난은 사회적 현실보다는 정신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써왔다. 루터(Luther) 또한 가난의 의미에 대하여 어떠한 사회경제적 해석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기독교인은 부와 획득에 대하여는 관심을 초월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회복지운동가인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을 정신적으로나 관념화로 몰아붙이지 않았고, 가난의 문제는 분명히 해결되어야 함을 말했으며, 그의 중심사상으로 나타내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21절까지 기록된 말씀에 보면 「부자가 농산물을 비축하고 있는 것은 죄악이라」고 지적한다. 남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혔기에 죄가 아니고 소유한 그 자체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25장 42절에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아니했다”고 예수가 말할 때 25장 44절에서 “어느 때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른 것을 공양치 아니했습니까?”라고 죄인이 반문했다. 이 때 예수는 25장 45절에서 46절을 인용하여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너희는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라”고 했다. 예수는 가난한 자 구제행위를 통하여 잘 살수 있는 경제사상을 말했는데 오늘날 사회복지의 궁극적 목표가 경제적 안정을 요구하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예수는 사회복지운동가로서 손색없는 자로 볼 수 있다. 사회복지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살필 때 병자치유는 예수의 깊은 관심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는 구약사상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는데, 즉 병은 신의 저주로 생각하고 병에서 고통 당하는 장애자들이 있음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을 위해 왔음을 말했고, 그들을 직접 치료했다. 예수가 심신장애자들을 고친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 거들떠보지 않던 소외계층의 민중들이었고, 또한 장애자들을 치료하되 완전히 회복하도록 해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활동할 수 있게끔 했다. 장애자라 해서 사회에서 불이익과 소외를 당하며 정상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복지운동에 위배가 된다.
예수님은 사회복지운동가로서 인권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핵심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천년전 팔레스틴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압박 받는 자들, 특히 인간 대접을 못 받는 여자, 가난한 자들, 창녀, 세리, 죄인, 사마리아인, 병자, 정신환자, 이방인 등의 인간해방을 외쳤다. 예수님은 이러한 소외계층을 억압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그 당시 지배체제를 향하여 항거하는 언론을 폈다. 처음에는 회당에서, 탄압이 심해지자 나중은 산과 들에서 인권회복을 외쳤던 것이다.
예수님은 팔레스틴에서의 진정한 사회복지 국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지배계층의 불의와 부정, 위선과 교만, 민중을 억압하는 악법등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회복지 강연은 언제나 생명을 건 모험과 긴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민중의 인권회복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길만이 참 복지사회로 가는 여정임을 알았기에 사회정의를 말했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Ⅳ. 나가는 말
예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병고치고 구제하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인간을 소외계층으로 보셨다. 그래서 병든 자와 죄인에게만 자신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비록 자신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이 가난한 자임을 고백하고 인정해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이고 최우선적이셨다. 한국교회는 이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과 성육신의 자세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의 경건은 부패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곧 고아와 과부들을 볼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목회에는 그 지역사회에서의 가난한 자들,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만일에 우리들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는 성경적인 기준에서 대단히 미흡하다. 교회헌금의 거의가 교회 자체 유지를 위해 쓰여지고 교회 밖의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동족을 위해 사용되어 지는 몫이 너무나 적다. 헌금을 내게 할 때는 성경적으로 내게 하고 쓸 때는 성경적으로 쓰지 않는다. 현재와 같은 IMF의 상황에서 총회가 각 개교회에 권면한 「모든 교회의 재정 중 십분의 일은 구제비로 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그러한 측면에서 아주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사회복지운동가로 찾아 오셨다. 그의 행적이 기록된 복음서에는 현대적 사회복지 개념 및 전통적 사회복지 개념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사회복지운동가로서의 생애와 사회복지의 성취를 위해 노력했던 분이시다. 그가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인 자들을 가난한 자들, 눈먼 자,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굶주리는 자, 우는 자, 죄인, 창녀, 세리, 귀신 들린 자, 박해받는 자, 억울한 자, 묶인 자, 무거운 짐 진자, 율법을 모르는 천한 족속, 군중, 보잘 것 없는 자, 맨 끝에 앉은 자, 어린이,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이었다. 오늘의 용어로는 하류계급, 피압박자들이라 부를 수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병든 자리에서, 인간이 눌린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사렛 회당에서 사회복지운동가로서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19절을 선언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한다면 똑같은 선언을 모든 억눌린 자들에게 할 것이다.
우리는 입술로 말하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그것을 삶과 행동에 옮기는 것에는 아주 인색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은 쉽게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교회가 열리지 않고 폐쇄적일수록 하나님의 백성답게 누리는 삶이 되지 못하고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욱 곁길로 가는 것을 보는 방조자가 될 뿐이다. 이 땅에 사회복지운동가로 오신 예수의 삶이 그러하셨듯 교회는 더욱 낮아진 모습으로 이웃을 섬겨야 한다. 누구든지 먼저 된 자이길 원하고 섬김과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이 세대 속에서 교회는 참된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한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진실된 모습으로 세상을 감동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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