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난 사회복지
1. 빈민 구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회복지
1) 가난의 개념
‘가난’(poverty)이란 말은 신학의 핵심어로 이미 구약성서에 언급되었으며 공관복음서의 자료인 Q자료에는 「가난한 자들」이 예수의 선포를 받아 들이는 자로 나오며 「예수살렘의 가난한 자들」은 바울과 예루살렘 공동체의 투쟁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가난」이란 개념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데 세가지의 근본적 의미가 있다. ① 가난은 경제적 개념이며, ‘빈자’들은 타의에 의해 무소유자들인 것이다. ② 가난은 금욕주의의 이상이다. ③ 가난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겸손과 정신화된 자족으로 말해지며, 신학적인 사유와 교회의 힘과 관련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2) 부의 비판
성경은 소유와 부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가한다. 부의 추구는 예수님의 정신에 위배가 된다. ‘맘몬’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한쪽을 사랑하고 위하면 다른 한쪽은 배척되기에 어떤 타협도 불가능한 것이다. 황금만능과 하나님 경배는 모순이 된다는 말이다. 많은 재산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된다. 돈과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복음서의 가장 어려운 부분에 속하여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 중 가장 놀라운 것은 부를 소유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하리라는 것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그 말을 받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수군거릴 때 하나님의 힘으로는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부자가 자기 재물을 포기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한 청년이 예수 앞에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했을 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거라” 는 예수님의 말씀에 재물 많은 부자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부자들이 없는 곳이다. 가난한 자, 배고픈 자, 우는 자들에 대한 축복과 그에 대비하여 부자, 배부른 자, 웃는 자에 대한 저주의 외침을 성경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가난한 자인 민중의 편에 서서 지배층을 비난하는 부분은 누가복음에도 나타나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대표적이며, 또 마22:1-10과 눅14:15-24에 있는 ‘큰잔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지배층과 가진 자에 대해서는 재고의 가치도 없으며 하늘나라의 무자격자들로 단정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풍요로운 생활을 한 부자와 그 집 문간에 앉은 종기 투성이의 나사로를 대비시켜,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만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입을 빌려 예수님은 부자계층은 예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3) 가난한 자 예수와 가난한 자 구제
예수는 가난한 자의 대명사이며 가난한 자들의 희망이었고, 그가 탄생한 팔레스틴은 피압박의 상징이었다. 유대인들은 유사 이래로 계속해서 피압박자로 방황을 거듭했다. 예수는 가난한 자로 베들레헴의 말구유간에서 탄생했다. 예수의 직업은 목수였는데, 일반적 사회상황에 비추어 볼 때 소득성이 없는 빈곤한 처지였다. 예수는 또한 공생애때도 아무 것도 소유가 없는 무소유의 생활이었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이웃을 사랑하라’는 박애정신, 자비행위의 교리와 교훈은 신약전문에 담겨있는 중요골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예수의 공적 생애의 첫 출발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였고 또한 마지막 십자가의 희생도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가버나움에서의 사회복지운동으로서의 첫 출발의 강연은 이사야서에 담긴 내용이었다. 예수의 사회복지 사업은 그 시에 기록된 바로 그것과 같았다. 누가는 그 시문을 적당히 손질했다기 보다는 예수의 업적에 가깝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손질한 시의 내용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보다 더 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일으키고 그들의 지위를 끌어 올리는 일들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게 한다.
예수의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며 가난한 자는 예수의 사상과 인격의 전부였다. 인간다운 생활을 못하고 있는 가난한 자에게 예수는 구원자로 나타났다. 예수를 따르고 메시야의 대망을 가졌던 자들은 바로 헐벗고 굶주렸던 민중들 즉,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정신적 위로와 희망을 가지지 위해, 새시대 새지도자의 출현을 기다렸다는데, 그가 바로 굶주림 속에서 구제를 외친 사회복지운동가 예수인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은 실업, 또는 굶주림, 이런 것들은 그 당시 일상적인 경험이었다. 예수 당시의 경제생활은 농경생활이 주종이었으며, 대부분 빚에 시달렸다. 소작제도의 불평과 농토가 없는 노동자는 길거리를 방황하여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나타낸 성경의 본문을 살펴보면, 무리들을 측은히 여기고, 목자 없는 양과도 같이 시달리고 지친 민중을 불쌍히 여기셨고, 나인성 과부의 딱한 처지와 눈물을 보시며 ‘울지 말라’고 감싸주시는 예수, 한 나병 환자를 두 사람의 소경을 먹을 것이 없는 여러 사람들을 예수가 불쌍히 여겼다는 부분과, ‘울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 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던지는 부분들을 볼 수 있다.
4) 소득 재분배론
예수님은 사회복지운동가로서 소득재분배론을 내세웠는데 먼저 일반적인 소득재분배론을 살피면, 소득재분배정책이란 사회에서 여유있는 사람들의 소득이나 재산의 일부를 정부가 소득세, 상속세 등의 형태로 징수하여 이것을 사회보장으로 가난한 자에게 이전하여 사회 전체의 소득분배를 균등화 시키려는 정부 재정의 기능을 말한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마리를 들고 감사 기도한 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시키는대로 4천명에게 골고루 재분배하여 주었다. 또 예수님은 5천명의 군중을 바라보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린후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게 하여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했다. 이와같이 예수는 균등, 공평 분배론을 가장 먼저 말했고, 실천한 소득 재분배론의 창시자였다. 법적으로나 상식적 양심에서 부자가 되었더라도 재분배하지 않고 소유하고 있다는 그점 하나만으로도 예수의 비판 대상이 되는 것이다.
최대생산, 최대소비는 자본제국주의적 경제관이다. 일용한 양식이상의 물질적 소비에 삶의 기쁨과 의미를 찾든가 그러한 문화나 예술창조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 헐벗고 굶주린 자가 있는데 물질적 풍요 사치와 방탕이 존속하는 것은 분명히 죄악이다. 그래서 예수는 재분배하지 않는 가진 자에게 무서운 경고의 말을 하는 것이다. 소득의 평등과 축적의 공유화가 이뤄줘야 한다. 최대 다수의 평등분배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하며 분배의 간격을 좁히고 재분배의 정의를 세워야 한다.
2. 병자 치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회복지
장애자는 일반적으로 심신장애를 원인으로 해서 남의 원조와 협조 없이는 기본적 생존마저도 확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신약성서에서 장애자와 관련된 내용이 71곳이며, 예수님은 유대인사회에서 소외되고 멸시받는 장애자들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겼다. 그는 나환자, 중풍환자,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 어눌한 자, 저는 자, 앉은뱅이들을 치료하였는데, 사실 구약시대 장애자는 사제의 신체조건에도 탈락되고 죄의 댓가 등 불이익을 받았고 부정적으로 일반인들에게 해석되었다. 유대인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의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경된 장애자를 향해 뉘 죄인가 질문을 한다. 그 때 예수님은 장애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 장애인 본인이나 그 부모의 죄등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에서 생의 독특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심신장애자들에 대해서 적극적, 소망적 해석을 내리고 있다.
예수님의 사회복지 실천은 구체적으로 질병치료로 나타났는데 그 당시는 상당수가 장애자였다. 예수 당시에 의원이나 의사가 있기는 했으나, 극소수이고 의학지식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가난한 자들은 진료 받을 기회가 오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이들을 위해서 예수는 치료자로 나타났다. 예수는 환자를 보고 무관심하거나 도외시하거나 냉담하게 방관하지 않고 많은 장애자를 고쳐 주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쳤다. 예수는 심신장애자들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장애자를 고쳐준 이유는 마가복음 1장 41절에 의하면 한 문둥병자가 예수 앞에 엎드려 고쳐 달라고 애원할 때 예수님은 민망히 여겼다. 그는 순수한 사랑과 자비의 결정체였기 때문에 병자를 볼 때에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한결같이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치료해주는 완전한 치료자였다.
예수의 사회복지운동은 한마디로 해방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신병을 치료한다는 구체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구조적인 해방을 말하며 그것은 사회적 해방의 사업까지 포함한다.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사회적인 구조악까지 바르게 하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인식한 사회복지운동이다. 예수님의 장애자 치료행위는 장애자 문제해결의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치료행위 안에 함축된 내용 속에서 오늘날의 복지국가의 이념, 인간의 존엄과 가치, 사회정의, 사회보장과 사회복지의 기본정신을 찾을 수 있다.
3. 인권 회복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회복지
예수님은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생명을 보호하며 모든 인간이 인간본연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한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민중의 삶의 자리인 팔레스틴에 찾아왔고 갈릴리 무리에게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민중해방과 인권회복의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인권존중은 그 근원인 유대민족의 신앙에서 뿌리를 내려 기독교에 의해 육성된 사상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는데 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상이 기독교 인간관의 토대를 이루며 그러한 기독교적 인간관이 근세에 있어 인격존중의 의미가 되었다. 예수님은 인간의 소중함을 눅15:4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했다. “99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떠난다”. 예수님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인권선언은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28절까지의 내용으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는 어떤 제도이건 비인간화로 향하는 모든 요소를 철저히 거부한다. 그는 특히나 유대사회에서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여자, 가난한 자, 창녀, 세리, 죄인, 사마리아인, 병자, 정신환자, 이방인들을 높여주고 칭찬하면서, 그들의 인권을 회복시키는데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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